원리주택 (오우수 설비 전기 배관, 기초매트 타설)
아침입니다.
깃을 치듯 집을 나섭니다.
오늘 하루 얼마나 많은 힘듦과 얼마나 많은 기쁨이 내 앞에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하는 두려움과 설렘을 동반한 채 말입니다.
저녁 무렵 오늘 하루가 나를 속이지는 않았다고 중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냥...
모든 일에 할 수 있는 한 내 정성을 다하리라.
그렇게 다짐하는 아침의 그 순결함을.
그런 마음으로 늘 하루가 새롭기를 바랍니다.
새벽이면, 동틀 때면 나는 자신이 잠들었던 곳을 떠납니다.
그리고 황혼이 올 때면 다시 하룻밤 잠자리를 찾아 들어옵니다.
오래 가지고 싶었던 새 겨울 코트에 새 목도리를 두르고 집을 나서는 아침의 그 기분을 아시나요?
혹은 길렀던 머리를 목이 시리게 느껴질 정도로 짧게 자르고 어느 저녁 무렵 거리에 섰을 때 같은 그런 느낌.
글을 쓰고 기록하는 일이란 두 가지가 가능합니다.
기다리는 일과 고치는 일.
글이 써지지 않는다던가 아직 쓰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될 때 글은 얼마든지 기다릴 수가 있습니다.
미비한 자료를 보완하고 구성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하며 스스로 이제 되었다고 생각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있습니다.
10년 전의 글도 오늘 수정했던 것처럼 글이란 끊임없이 고칠 수가 있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그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말은 그것이 공기를 타는 그 순간이 완성입니다.
아니 완결입니다.
되돌려서 그것을 다시 말할 수도 없고 다른 소음으로 바꿔 내보낼 수도 없습니다.
소리의 절대성.
말을 하는 그 순간 그 말이 사라지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기초 타설도 그렇습니다.
설비 배관이 잘못되었거나 슬리브를 하지 않고 콘크리트를 부었다면 과실입니다.
그렇다고 견고한 기초 바닥을 뜯을 수는 없습니다.
고치고 수정하는 것에는 하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미 뱉은 말에 수정을 하는 것은 거짓이고, 고치는 일은 이미 작업한 것에 대한 부실로 이어집니다.
덧대거나 다른 방법으로 돌려서 하는 것이니 정도(正道)는 아닙니다.
이것은 또 얼마나 우리 인생살이와 닮아 있는지요.
우리는 지나간 청춘을 되돌려서 살아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어제의 방송을 오늘 되돌려서는 보지만 다시 고쳐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 시간, 그 순간이 절대이면서 또한 완결인 것입니다.
고등학교 때 좀 더 공부를 열심히 했더라면...
그때 직장을 그만두지 않았다면....
그때 남자와 헤어지지만 않았다면...
하는 가정이 우리의 삶에는 불가능합니다.
이미 그 시간, 그 공간에 공그리를 붓듯 견고한 마감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생각할 때의 그 쓰라림이 바로 인생이며 그래서 그 순간의 절대성 때문에 오히려 인생은 더욱 거룩하고 치열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삶의 소중함이 그 일회성에 있듯이 우리의 인생 또한 헛되이 써버려서는 안 되는 중요성이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