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소리

吉子씨

慧圓 2010. 7. 9. 06:37

길자(吉子)씨는 그 동네에서도 괄괄하기로 소문난, 남자 못지않은 성품을 가진 남편조차 큰소리 내지 못한 주암댁의 맏딸로 태어났다.

그러한 어머니에게 공포심마저 갖고 있던 그녀는 어렸을 때 부터 해뜨고 질때까지 품앗이며 밭일, 농사일이 끊임이 없었다고 했다.

하루일을 마치면 어린동생들을 보살펴야 하고, 산에서 장작을 마련하고...

잔정이 없던 어머니에게서의 따뜻한 품은 꿈같은 일이라 회상한다.

결국 고향을 등지고 도시로 진출하기로 마음먹은 그녀가 무일푼으로 무작정 부산으로 넘어온 것이 방년 16세.

 

도시의 삶은 늘 그녀를 허기지게 했는데,

그러나 어머니를 미워하면서도 딸은 자신도 모르게 엄마의 기질을 닮아가는가.

홀홀단신 객지로 나선 길자씨는 막막하였지만 일이라면 워낙 이력이 있는 그녀로서는 맏이의 책임과 강인으로 무엇이든 닥치는대로 접한다.

허드레 일부터 시작해 리어카 과일장사로... 조금씩 기반이 다져지자,

자신의 맏딸이 부산에서 과일장사로 돈을 잘 벌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아버지.

길자씨는 혼자 입에 풀질하기도 힘들었지만 그나마 어머니가 아니라서 다행이라 여기며 과일을 실은 리어카를 부녀가,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며 해서 벌인 소득으로 겨우 방 한 칸을 마련할 수 있었다.

억척같은 뚝심으로 무슨일이고 마다않던 그녀에게 차츰 여유가 생기자, 여동생들을 챙겨야 겠다고 생각했을 땐 막내가 이미 큰언니에게 가겠다고 가출한 뒤였다.

겁도 없이 그 어린 나이에 여수에서 배를 타고 넘어온 막내는 연안부두 근처에서 마냥 울면서 서울역에서 김서방 찾듯 언니 이름을 부르며 찾았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부산 부평동에서 상봉한 그들, 아버지와 자매는 함께 삶의 터전을 일구어 나간다.   

안해본 것 없이 식구들을 부양하며 버젓히 집 한 채를 장만하여 씩씩하게 살아온 여인, 그 이름도 길자씨.

 

여기서 잠깐,

집한채의 내력을 보면 전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의 스토리가 있다.

피난민 시절이었던 당시.

여러개의 방으로 갖춰진 꽤 규모가 있던 기와집에 일본인이 거주하고 살았는데 해방이 되어 패망의 일본인들이 자국으로 쫒겨나면서 버리고 간 그 빈집으로 길자씨가 '내집이다' 하며 들어 앉았다는 설이다.

어수선한 사회구조상 행정조치가 어떻게 이루어 졌는지는 모르겠다만,

일본인이 집을 버리고 도망가면서 마당에 묻어 놓았던  장독에서는 귀중품과 화폐가 그득차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

지금으로 치자면 행운으로 졸부가 된 길자씨를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남아 돌던 방을 삯월세를 놓으면서 확고하게 주인자리를 굳혀 나갔다.

그 와중 고향에서 연정을 품고 있던 이웃남자와의 사이에서 1남 3녀를 두게 되지만, 남편복이 없던 그녀로서는 막둥이를 낳고 이태만에 위암으로 앓던 남편과 사별하게 된다.

 

길자씨는 누구보다 학구열이 강했다.

그것은 그녀안에 내재 돼 있는 다른 어떤 욕구보다 강해 거의 집착에 가까울 정도여서 자신은 비록 문맹이었지만 아이들의 교육이라면 무슨일이든 마다하질 않았고 남들 하는 과외란 과외는 빠뜨리지 않고 시켰으니 항상 자식들의 성적표는 낙엽이 우수수 떨어졌었다.

단,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제외하곤.

주위 사람들이 여자 혼자 힘으로 대단하다고 부러워 했었던 건 당연한 일.

 

세월이 흘러 그녀의 자식들도 장성해 막내까지 교육을 마치고 직장을 다니던 어느 날,

막내가 들고 온, 듣도 보지도 못한 노인 대학이라는 입학 양식을 건네 받는다.

처음엔 귓전으로 흘리다가 내재돼 있는 학구열에 슬금 당기기 시작한 불씨.

예전부터 제 이름도 못쓴 설움이 떠오르니 한글을 깨우치고 싶다는 욕망이 이는 것이다.

밀쳐둔 입학원서를 당겨보는데 꼬부란게 글씨요 여백이 종이인게라...

다음날, 접수시킨 막내에 이끌려  어언 2년동안 학습에, 야유회에, 어울림의 모임에 또 다른 세상에 눈을 뜬 그녀.

졸업할 즈음엔 초등학교 1학년 국어교과서를 띄엄띄엄 읽을 수 있는 정도까지 되었다.

그것이 막내에게 제일로 고마운 일이었다 한다.

 

길자씨는 나의 엄마이다.

주암댁의 맏딸로 태어난 그녀가 자식을 교육시킨 심지는 '애비없는 자식'이란 소리 듣지않기 위함이었단다.

어느 가정보다 엄격하고 매를 잘 들었던 엄마는 특히 내게 모질었음을 기억한다.

내게 막둥이의 특권은 엄마에겐 통하지 않는 의미였다.

유독 매 타작이 심했던 오빠를 보고 자란 내가 겁이 많았던 것도 고집이 센 나에게 아마 외강내유의 근원이 되지 않았을까.

노인대학에 입학을 시켜 드리면서 엄마의 열정을 의심하지 않았던 내게 황당하였던건, 한 학기 마칠때쯤인가..

퇴근하여서 보니 엄마가 무슨 종이를 보며 하염없이 울고 계셨다.

뭔일인가 놀란 내가 펼쳐본 종이는 한글 받아쓰기 문제지 였는데 매긴 점수가 30점 이었던 것.

열문제중 세개만 맞았다고 엄마는 좌절감에 한없이 우셨다.

꾸준히 동화책을 사드리며 관리를 해 드렸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한 나의 불찰에 또 어느덧 시간이 흘러 다시 까막눈이 되셨다.

얼마전 다리관절 수술로 다니기 용이해진 엄마의 잦은 외출이 궁금하던 차, 미니 병문안 오시더니 연필깍기가 필요하다 하신다.

---요즘 어딜 그렇게 다니세요?...

배시시 웃던 엄마가 "요 앞 회관서 공부하러 다닌다. 한글공부..."

팔순이 넘은 그녀에게 한글이 절실히 필요한 그 무엇도 있을게 아닐진데,

그 끝없는 배움의 열정에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을 수 없다.

처음 글자를 읽혔을 때 기뻐하던 엄마의 모습이 아른거려 챙겨드리지 못한 자식의 불충에 가슴이 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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