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시험하려 한다면
인간이 가질수 있는 <의심>만이 그렇게 만든다.
그리스 신화의 신과 인간의 전쟁도 그것 또한 인간이 만들어낸 이야기 일 뿐이지,
실화의 바탕을 둔 것도 아니며 사실을 근거한 역사가 아니지 않는가.
신의 존재에 대한 의심의 발로이기 때문에.
"어떻게 할까요.."
나의 지시를 기다리던 임이사에게 확신을 심어주자면 그것은 옳았다.
확신을 갖고 처리하는 것과 가정을 갖고 처리하는 것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으므로.
그러나 난 정확하게 진실을 알아야 했었다.
또한 원칙은 진실을 가장해선 안된다.
상대의 배려를 탓할게 아니라 잘못 인지한 내게 책임이 있는 한.
내가 원칙으로 한 모토에 어긋남이란, 상대가 아무리 주지를 햐였어도 객관성을 배제하였던 이유이다.
나의 상실감은 자신의 정체와 동반의 정체를 느낄때 더욱 커진다.
자신의 가치나 행동에 덜 주의를 기울이게 되고 대신 옆사람의 상황에 초점을 두게 됨은
개인의 책임감보다 동반자의 책임을 더불어 안아야 하는 부담을 가지므로 비중이 더욱 크다.
자존심과 체면이 바닥의 끝을 보는 시간,
오히려 임이사의 위로가 한없는 초라함으로 끝도 보이지 않는 나락으로 추락한다.
아,아, 이게 혼자만의 고통으로 가질수 있다면.
예상 되었던 결과라면
일의 준비가 목표를 향한 과정에서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았든가를 따지는건 중요하지 않다.
목적했던 결과를 두고 타인의 시선까지 우려하는 것이 과욕이고 사치이지만.
이성과 원칙에 대한 성실만이 자신과 타인에게 떳떳할수 있음이지,
잘못된 방법으로 자신을 합리화 시키지 않아야 한다.
자신의 판단력을 높게 평가하는 경향은
혹 실수를 했어도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피치못할 사정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합리화시키는데 문제가 있다.
두마리 토끼도 잡기 힘든데 어찌 서너마리를 잡으려 하는가.
도망간 토끼들의 아쉬움보다 잡힌 한마리의 획득에 만족해야 할 것이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중요한 결정을 다수의 판단에 맡기는 경우가 있다.
회사에서의 중요한 결정은 한 사람의 판단보다 회의석상에서 이루어지듯,
혼자 결정하는 것보다 다수의 의견이 그들의 지식과 경험을 모두 동원할 것이며 따라서 더 나은 결정을 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조직의 효울성이라는 것은 해결해야 할 과제가 어떤 종류의 것이며 그들의 자질이 어떠하며 상호작용이 어떠한가에 달려있지만.
이런 모든 것이 적절치 못할 때, 조직이 개인으로 행동할 때보다 못할 경우가
조직의 응집성이 강할때 나타나는 사고이다.
굳이 원인을 꼬집자면 조급하게 다수의견의 일치를 추구하기 때문인데 동조하는 압력이 가미된다.
어떠한 일일지라도 반대자를 끌어들이기 위해선 상당한 조치가 취해져야 하는 경우인데
대부분 반대자의 의견은 그들의 착각인 도덕성 높은 조직이라는 기류에 보호받지 못한다.
이런 분석을 난 우선 먼저 했어야 했다.
만신창이가 된 지금에서야 정신이 드는것이 견디기 힘들다.
삼류토크나 대중가요가 우리에게 와 닿는것은 공감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지.
<무심>을 당한것 같은 에미가 두아그에게 요즘 유행하는 개그를 던진다.
"날 사랑하기나 하는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