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경주의 하루

慧圓 2018. 10. 22. 09:57

 

 

그 여름은 나에게 있어 뱀의 허리와 같았다.

뱀의 어느 부분에서부터 허리를 찾아야 할지 모르는 길고 지루함. 영혼이 빠진 무료한 시간들.

저울대 눈금 위의 수평을 유지하는 무게의 여름에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용서받아야 할 짓들을 했던가.

내가 누구를 미워해야 할 아무 까닭도 없었다. 그것은 다만 내 결정의 탓이었고 과욕 때문이었다.

내가 여기에서 그만 이 관계를 끝내기로 했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은밀하게 화합할 수 있었으리라.

 

 

 

 

 

 

내가 한 '출발'이라는 말이 조금은 부끄러웠다.

떠난다는 말이 가지는 의미 속에는 한 공간으로부터 나간다는 뜻이 강했기 때문에, 나는 내가 가고자 하는 뜻을 자신에게 확신을 심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한 가닥 뻗어 있는 먼 길, 쓸쓸함, 잊혀질 줄 알았던 추억, 덧없었던 사랑의 어느 구석, 그런 것들을 떠올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난 경주에서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 했다. 아니 보이지 않았다.

무엇을 볼 수 있으랴.

경주가 나에게 준 그 많은 햇빛의 의미들, 너무 오래 이 곳의 바람에 길들여져서 어느새 어둡고 좁은 도시의 것들을 견디지 못하게 된 나를, 그 모든 것을 어떻게 말할 수 있으랴.

이제는 불빛까지도 화려해진 조형의 구석까지도 비추고 별들도 멀어진, 도시의 냄새로 다가와 있는 곳이 경주였다. 

숙소에서 바라보던 사흘 동안의 낮고 야트막한 산들.  미기未期의 사흘이 보여 주던 도시.

그것은 자궁 같다.

이 세상의 모든 사라지는 것들과 새로 태어나는 것들의 자궁. 때로는 무덤이기도 했던 공간.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죽음과 패배가 거기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내 마음의 고향이 아닌 그냥 <도시>였다.

햇빛 속에서 반짝이고, 긴 날개를 가진 새들이 물을 차고 오르고, 석양이 들판의 옆구리를 간지르듯이 황금 물결을 띄워 보내고, 구름을 뒤집어 옥색으로 빛내며 하늘을 핥는 그런 고향이 아니었다.

나도 마음이 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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