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인간에게는 어떤 환경에서든 적응해 나가는 능력이 있다.
굳이 아리스토 텔 아쟈씨의 말이 아닐지라도 우리의 생존 유기체는 삶을 영위하는데에서 환경에 지배를 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 동물이란, 환경을 적극적으로 조성하는 존재와 주어진 것에 일방적으로 적응해나가는
존재로 볼수 있을것이다.
우리는 대체적으로 이러한 적응에 익숙해져 도전정신이 무뎌지는 것을 간과하지 못한다.
우리가 받는 교육현실이 어쩔수 없고 또한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아는데도 세습이 되어 가는건
적응해진 환경에 둔감해짐과 익숙해져 가고 있음이라.
다만 개인적 강도의 상향치가 다를 뿐이다.
우리 미니,주니에게 그런 양상은 뚜렷하게 나타난다.
2년전부터 간간히 언어연수를 위해 지나가는 말처럼 흘렸던 나의말에 아이들은 질색을하며 마다했다.
처음엔 환경을 벗어나는 불안함과 에미품을 떠난다는 두려움이 작용했을 것이다.
주니는 벌써 군입대를 위해 집을 떠난다는 걱정을 한번 토로한적 있었으니...
획일적인 교육풍토를 탓할수만도 없는 것이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
그래서 이런 변화와 도전정신을 주입시킬 필요가 있다.
어제, 헬렌언냐와의 많은 대화중에 한국 유학생들의 경험부족에서 오는 무지와 그릇된 사고방식을 들었다.
우선 부모의 욕심에 따른 책임이다.
사회적으로 획일화된 교육현상을 탈피하고자 나은길을 선택함에, 그 길만이 우선시 해야 할것이 아니라
아이의 장래를 최선의 방법으로 최후의 목적을 위해 같이 의논하며 선택하여야 한다.
자국에서 관철이 안될때에 차선으로 새로운 환경에의 도전을 시도해야 할것이다.
학업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용접공을 시키더래도 말이다.
우리는 도전과 개척정신을 길러줘야 하는 책임을 느낄 필요가 있다.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한 사람의 청년에게는 그것은 미지의 세계를 향하나 열망일 수 있다.
삶의 개혁이나 발전일 수가 있다.
미국의 정신이란 바로 그런 탈고향(脫古鄕)의 정신, 프론티어 정신은 아니었던가.
서부 개척정신이 지금의 미국이 현존하듯이 우리에겐 아직 경직되어 있는 실용정신을 풀어야 할것이다.
모자라면 모자란대로, 힘들면 힘든대로 고통이 따르는 훈련을 시키고
대처하는 방법, 삶을 살아가는 방법, 고통을 최소화 하는 방법을 자신이 찾아 연마해야 할것이다.
어차피 고통도 익숙하면 둔감해진다.
그런 훈련으로 인하여 인간은 강해져 가는 것이며 건강한 삶을 가질수가 있다.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능동적인 개체가 되는것,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이끌며
창조적 사고로 주위를 변화시킬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성공으로 가는 인생이 아닌가.
굳이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더래도 지금 우리 아들에게나 나에게나 이 시점에
정립하여 진지하게 대화하기 위함으로 정리를 해본다.
아들에게 정체성을 심어주기 위함으로 내가 먼저 준비를 하여야 한다.
따라 나자신의 정체성 또한 분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