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 문을 여니 창가에 쏟아지는 아침 햇살이 책상에 아롱거리고 있다. 마음먹고 책장을 정리하다 두툼한 검은 지함紙函이 있어 들여다보니 신문 조각들과 낯익은 편지들이 가득 쌓여있다. 내 글씨로 보낸 편지들과 가계부 옆 귀퉁이에 첨부되어 있는 건강 정보, 간단한 요리, 유적지 등에 관한 자료들, 그때마다 필요한 기사가 나오면 오려서 모아 놓았던가 보다. 날짜를 보니 2002년ㅎㅎ
그러고 보니 메모 창고에는 미처 보내지 못한 수많은 편지와 자료들이 저장되어 있다. (만약 내가 없어진다면 이것들은 어떻게 되지?)
아침에 써둔 편지를 넣어두었다가 오후에 다시 이어 쓰기도 하고 전날 쓴 편지에 계속 쓰기도 한다.
편지들을 쭈욱 읽고 나니 수십 년이란 세월이 모래시계처럼 가슴에 흘러내리는 것 같다.
지속적으로 한 대상에게 편지할 때 그렇듯, 아이들이 늘 마음속에 있어서 틈날 때마다 옆에 있는 듯이 썼더니 이보다 더 정겨운 것이 없다.
내가 내놓은 한 생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 것을 지켜본 기간이며 에미로서의 의무를 다하며 행복했던 시간들.
자식도 품을 떠나면 하나의 독립된 영혼이라지만 그 영혼도 부모가 물려준 인자가 아니던가.
주니냐
오늘 너를 먼 이국으로 보내고 내내 하늘만 바라보았다. 구름은 무심한 듯 흘러가지만 에미는 무사, 무사만 외우면서 가는 도중을 염려하였다.
군대와는 또 다른 염려로 들판에 보내는 것처럼 안쓰럽구나. 그러나 한편으론 네가 더할 나위 없이 대견하다.
여자친구도 물리치고 네 공부를 위해 가겠다며 스스로 준비하다니.
에미가 바라는 건 오직 너의 행복이니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해서 행복하다면 경제가 부족한 중에도 하도록 수레를 끌 것이요, 가정에서 행복을 찾는다면 저잣거리에 나가서라도 네 짝을 찾아줄 것이다.
모쪼록 건강 조심, 사람 조심, 불조심할 일이다.
세상에는 가끔씩 행운이 따라다니는 듯 보이는 사람이 있다.
늘 운이 좋아 절로 매사가 잘 되고, 많은 것을 누린다. 매사가 어렵게 꼬이는 운 없는 사람이 되는 건 분명 고달픈 일이지만 에미는 주니가 남들에게 '운 좋은 사람'으로 불리는 걸 바라지 않는다. 자기가 노력한 만큼 공정하게 대가를 받는 것이 최선이다. 불공평하게 주어진 행운은 그만큼 다른 사람 몫을 박탈한 것이니 질시를 받기 마련이다. 큰 사람이라면 불운도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으니 운을 잡으려 하지 말고 그저 소처럼 성실하게 살아가거라.
친구처럼 주니에게 편지를 쓰노라면 에미는 의욕이 솟고 더할 수 없이 희망에 찬다.
오늘의 금언 하나. 성실, 건강, 온순한 인간.
완벽한 인간은 없어서 주니도 고칠 점이 많으니 노력하여 자신을 개선하도록 하자.
이 나이 되도록 벌거숭이처럼 살아왔으면서 에미가 네겐 너무 욕심을 부리지? 한밤에도 문득 전화를 걸어 얘기하고 싶지만 머나먼 타국에서 고독을 단련하고 있을 너를 생각하고 자중한다. 지금 무얼 하느냐. 자고 있느냐. 배는 차면 안 되니 이불을 꼭 덮고 자거라.
요즘 벚가지에 물이 올라 하루가 다르게 개화를 한다.
작년, 네 전역 후 밤 벚꽃길을 같이 걷던 생각이 나서 짠하여 석양에 혼자 소주를 마셨다.
네가 있을 땐 에미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집을 비웠지만 네가 떠나 있으니 이리도 허전하구나.
네 생각, 일 생각...마른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생각이 너무 많다.
겨울이 쫓기며 어느덧 조석으로 기온이 현저히 차이 난다.
에미는 일찍이 기상, 새벽에 현장 들렀다가 간단히 점검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와 네 생각에 글을 적는다.
우리 주니가 이제 스물다섯이다. 참으로 초봄과 같은 나이로구나. 청춘의 물이 올라서 꽃이 피길 기다리는 나이가 아니냐. 청춘이 아름답다지만 스러질 꽃이 아니라 영원한 꽃을 피우려 하니 이보다 더 보람된 청춘이 어디 있겠나. 젊은 날 세월을 허송했던 에미는 이제부터라도 만회하듯 서체에 오체를 던지려 한다.
어느 책에서 봤는데 중국인들은 학문을 추구하는 데서 제자를 격려하기 위해 靑出於藍而靑於藍청출어람이청어람이란 비유를 한다. 쪽에서 나온 푸른빛이 쪽보다 더 푸르다......스승에게 배우되 스승보다 나은 제자, 에미 몸에서 났으되 에미보다 나은 자식을 말한다. 우리 주니는 그리될 것이다.
오직 성실 성실 성실하게만 살아가면 모든 신이 살펴주시고 그에 합당한 보상을 주리라.
그렇다고 꼭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니 너무 작업에 치우치지는 마라. 집착하면 마음을 다칠 것이요, 또 몸을 상해서도 안 될 것이다.
건강이 제일이고 가장 소중한 것은 너 자신일 뿐이니.
너가 떠난 뒤로 거실 등을 꺼는 일이 줄어들었다. 일부러 켜 두기도 하지만 에미 혼자 조금 무섭기도 하고, 이국만 리에서도 에미가 등처럼 너를 지키고 있다는 마음이니 안심하고 네 생활에 전념하기 바란다.
에미가 음식을 해서 보내지 않는 것도 다 깊은 뜻이 있으니ㅋㅋ음식도 문화라 세계인이 되는 훈련도 해야지 입이 까탈스러우면 사람도 까탈스러워 보이니라. 어디서나 융화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주니가 도의를 두고 "착해요"했던 말을 상기한다.
그땐 네게 미안하도록 달갑지 않게 받아들였는데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에미가 참 어리석었다.
똑똑하다든가 이쁘다든가 그런 말을 하는 것보다 네 안목에 믿음이 간다고 해야 하거늘. 인간을 보는 관점이 善이라니 얼마나 갸륵하냐. 선보다 더 귀하고 월등한 품성이 있겠느냐. 에미가 주니에게 배웠다.
일하랴 사진 작업하랴 바쁠 테니 편지 쓸 시간 있으면 눈을 붙이는 것이 낫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니 시간을 황금처럼 아껴라. 젊다는 건 무한한 가능성이다. 시간을 아껴라. 항상 건강 조심하고 무엇이든 배우고 담아서 네 것으로 만들었을 때 햇빛 찬란한 국토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보고픈 준아
오늘은 할머니 모시고 야적장에 다녀왔다. 가까운 휴양림에 갔더니 홍매가 만발하여 온 사방에 짙은 향기가 고여 있는 듯하더구나. 앞에 이장 아저씨 집에 가서 작년에 담은 밤꿀을 두통 사 왔지.
날이 이제 더워지기 시작할 텐데 주야로 일을 하느라 얼마나 고생이 되는냐. 태양 아래 열매가 영글어가듯이 뜨거운 노력 아래 네 공부도 완성이 되겠지. 진실한 노력에는 부처님도 감응하지 않겠느냐. 에미는 사무실 피시 앞에 네 사진을 두고 아침마다 너를 위해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