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慧圓 2016. 12. 13. 09:31


준아

월요일 늦은 밤.

오후부터 하늘에 묵직한 먹구름이 가득 떠다니더만 결국 지금 밖에는 후두둑 소리내며 중비가 내리고 있다.

오늘 기숙사동 1층 슬라브 타설을 했는데 다행히도 무사히 마치고 저녁에 원청 직원들과 시마사끼-우린 이 짓을 항상 공정회의라 명명하지ㅋ- 한잔하고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 들려니까 빗방울이 창문을 요란하게 두드리기 시작하는 거야.  그나마 작업이 끝난 뒤라 안심이지 뭐냐.

어쩐지 오늘 낮부터 현장 위로 까마귀들이 얼마나 시끄럽게 울어 대는지.

엄마는 이제 저넘들을 길조로 만들었다 흉조로 만들었다가 그런다.  뭐 그날 그 날 좋은 일이 있으면 길조이고 나쁜 일이 있으면 흉조가 되는 것이고 그런 게지.

오늘 저녁에 너무 어이가 없는 것은 술자리에서 안주도 잘 먹었건만 숙소로 돌아와 씻고 나니 배가 고픈 거야. 헐~

며칠 다이어트한 노력을 무색게하고 어찌나 빵이 먹고 싶던지!

다시 무작정 나가 <뚜레주레> 베이커리를 찾아 족히 이백 미터나 걸었는데도 편의점조차 보이질 않는 거야.

우산도 없이 처벅처벅 걷다가 너무나 한심한 생각에 '아, 이게 무슨 짓인가... 이러려고 내가 상주에 왔나...' 그러면서  부리나케 되돌아와... 치킨을 시켜 먹었어.

허겁지겁 맹렬히 몇 점 집어먹고 나서 밀려드는 허망감.

아침이면 얼굴이 방만하게 부어 있을 내일의 운명을 상상하니 에미의 오늘 삶은 결코 행복하지가 않구나 ㅠㅠ   


준아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은 상상력이 아닐까 싶다. 상상력이 있어야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거든.

그래야 친절한 마음과 연민과 이해심을 가지게 되니까.

상상력은 어린 시절부터 길러 줘야 하는 건데.. 에미가 너희들에게 충족하게 그렇지 못했던 것이 가장 후회스럽다.

오로지 책임 의무감만을 강요시 한 게 아닌지...어린 너희들에겐 그런 단어의 뜻은 몰라도 되는 것인데,

무슨 일이든 스스로가 좋아서 해야 하는데 말이야.

이제부터라도 네가 제대하여 무엇으로 재미를 붙이고 집중할 것인지 상상해보렴.

앞으로 네가 무엇이 되어 있을지... 5년 뒤 10년 뒤.. 삼십대.. 노후에는....

어떤 위치에 있거나 어느 상황에 있어도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나 자신이 얼마나 즐겁고 재미나는 인생을 누릴지....

엄마는 네가 유쾌한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네가 키워 나가야 할 게 바로 그런 종류의 인격인 것이고,

아직 발휘할 기회가 없어서 그렇지 너의 기질은 이 에미를 닮아 상당하다고 보거든.

아들아,

엄마는 가끔 인생 반백 년 전을 회고할 수 있을 정도로 나이를 먹었다는 사실이 우울해.

어찌 사람마다 후회 없는 인생을 살겠냐만 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한 거지.

네가 슬슬 짜증 날 기색이 엿보이니 인제 그만~~ 


새벽에 현장으로 오는 도로는 대략 20킬로가 되는데 꼭 우리가 갔었던 에드먼턴 주와 비슷하다.

주변의 칠흑 같은 어둠이 그렇고, 황량한 광야 위로 쏟아지는 별빛이 그렇고, 저믄 달이 비켜 가는 새벽 여명이 또 그렇더라.

아, 우리가 헬렌 이모에게 다녀온 지도 벌써 5년이 넘었구나. 꼭 다시 가겠노라 여러 번 다짐했건만 올해 마지막 달력을 보며 또 한숨짓네.

네가 제대하면 다시 한번... 휴, 이제 섣부른 약속은 하지 않느니보다 못하니.ㅉㅉ


-가슴에 손을 얹고 안녕. 마지막 인사말이 멋지지?  무한한 사랑을 주는 엄마가 -


추신

1. 내의 : 흰색 반입이 될지 모르겠다만 작년에 사다 놓고 그대로 있어 보낸다. 95 사이즈가 맞을 텐데 네가 군 생활이 넘 편해? 살이 퉁퉁 쪄서 100 사이즈도 추가한다.

2. 까까 : 코스트코 갈 시간이 여의치 못해 -상주는 아예 없슴- 이마트에서 주섬주섬 챙겨 보겠다만, 네가 선호하는 것들이 없어 난감.

3. 찌게다시 : 주방에 먹다 남은 과자도 동봉하니 그냥 먹어 없애주기 바람.

4. 핫팩 : 작업자들 쓰라고 비치해 놓은 게 있어서 소량 뚱쳐 보내니 동료들과 나눠 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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